인동 장씨(仁同 張氏)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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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연 2012.08.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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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 장씨(仁同 張氏) 편
◇ 장군섭 대종회장 |
인동장씨는 인동에 관적한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금용(金用)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직제학공(直提學公) 계(桂)를 시조로 하는 계통으로 구분된다. 2)
이 두 집안은 시조를 달리하면서도 이제까지 금용(金用)을 시조로 하는 단일씨족으로 알려져 왔거나 또는 금용계(金用系)의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인식되어 왔다. 그 까닭은 등과인물을 다룬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이나 기타 문적(文籍)에서 이를 구분해오지 않은 등 여러가지 이유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인동장씨 금용계(金用系)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인동장씨는 고려때부터 관향을 옥산(玉山) 또는 인동(仁同)으로 사용하여 왔는데 금석문(金石文)·예간(禮柬) 등에는 주로 옥산으로 쓰고 있지만 그 외는 일반적으로 인동으로 쓰고 있다. 3)
◇ 옥산사 |
인동은 옛부터 성현(聖賢)을 존경하며 도덕을 기리고 학문을 숭상하여 예의를 지키는 고장으로 도학군자(道學君子)와 홍유석학(鴻儒碩學)이 많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어 왔으며, 각종 문헌(文獻)에 인동고을 대성(大姓) 가운데 인동장문(仁同張門)을 첫 번째로 기록하고 있다.
◇ 인동장씨 종택 |
인동장씨의 계보(系譜)는 대성(大姓)답게 여러파로 갈리어진다. 고려초 인동에 정착한 후 고려중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하여 무려 20여개 파로 분파(分派)되어 왔다.
인동향내(仁同鄕內) 5개파인 즉, 종파(宗派), 남산파(南山), 진가파(眞佳), 진평파(眞坪), 황상파(凰 派)가 인동의 본향(本鄕)을 지켜 왔으며 이밖에 20여파가 분파되어 전국에 살고 있다. 4)
첫째, 종파(宗派) 또는 중리파(中里派)이다. 시조공으로부터 36대손인 대종손 석원(碩源)씨가 인동에서 종가를 지키고 있다.
둘째, 남산파(南山派)이다. 15世 사천공(泗川公) 우에서 분파되었다. 조선초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천진 병마첨절제사(泗川鎭 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처음으로 남산(南山)에 살았으며 사천에 사적비(事蹟碑)가 있다. 5)
셋째, 진가파(眞佳派)이다. 16世 참봉공(參奉公) 맹창(孟倡)이 파조이다. 조선초에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을 역임하였다. 6)
넷째, 진평파(眞坪派)이다. 17世 죽헌공(竹憲公) 신손(信孫)에서 분파되었다. 조선 중종조에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중종2년 진사가 되었고 형과 함께 시묘(侍墓) 3년을 마치고 삭망제(朔望祭)를 평생동안 지냈는데 겨울인데도 뜰에 나물이 나고 호랑이가 산금(山禽)을 물어다 주어 제수(祭需)로 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동(洞)이름을 삭제동(朔祭洞)이라 한다. 경모소(敬慕所)인 원사정(遠思亭)이 석적면 포남리에 있다.
◇ 현암서원 |
한편, 황상파 파조인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장자(長子)인 곤(崑)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학덕(學德)과 문장이 뛰어났다.
첫째, 와천공(臥川公) 문중(門中)이다. 와천공(臥川公) 천한(天翰)은 곤(崑)의 장자(長子)로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에서 와천선생(臥川先生)이라 하였다. 여헌(旅軒)에게 준 자작시(自作詩)인 ‘산군행시(山君行詩)’와 ‘옥자시(屋子詩)’가 <옥산지(玉山志)>에 실려 있다. 후손들이 구미시와 칠곡군 등지에 세거한다.
둘째, 신암공(愼巖公) 문중이다. 와천공(臥川公)의 아우인 주부공(主簿公) 경한(景翰)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후손들이 구미시와 칠곡군 등에 세거한다.
셋째, 자성정(自醒亭) 문중이다. 자성정(自醒亭) 광한(光翰)은 여헌(旅軒)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문행(文行)으로 추존받았으며 오산서원장(吳山書院長)이 되어 임진왜란에 소진(消盡)된 서원을 중건하였다. 여헌(旅軒)이 지은 ‘자성정기(自醒亭記)’와 묘갈명이 있다. 후손들이 구미시와 칠곡군 등지에 살고 있다.
넷째, 기촌공(岐村公) 문중이다. 기촌공(岐村公) 용한(龍翰)은 율곡(栗谷)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문이 탁월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에 3년동안 지성으로 시묘하니 그 곳을 시묘동이라 하였다. 기산의 봉양서원(鳳陽書院)과 비안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하였으며 저서로 <대학연의집주(大學衍義集註)><주역삼육궁도설(周易三六宮圖說)><성리론(性理論)><경전주해(經傳註解)>등 다수가 있다. 구미시와 칠곡군, 성주군 선남면과 대가면 일대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다섯째, 개옹공 문중이다. 개옹공 봉한(鳳翰, 1566~1644)은 18世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손(孫)으로 조선조 의사(義士)이다. 후손들이 성주군 벽진면에 많이 거주한다. 개옹공은 동생인 홍한(鴻翰)과 재종제(再從弟)인 영남 의병장 사진(士珍)과 함께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칭송받았다.
여섯째, 판관공(判官公) 문중이다. 판관공(判官公) 홍한(鴻翰)은 문장이 조성(早成)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왜란때 금산·개령·선산·지례의 4고을의 소모장(召募將)으로 공(功)을 세웠다. 참판 정광적의 장계로 상주판관이 되어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휘하에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1594년 군중(軍中)에서 24세로 순사(殉死)하니 목사(牧使) 정기룡이 손수 염습하고 반장(返葬)했으며 괴걸인(魁傑人)이라 칭찬하였다. 장례시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예(禮)로서 장례를 지냈으며 뒤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증직받았다. 김천시 연화리 등지에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7)
이외 외지에 나가 있는 분파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함평파(咸平派)이다. 6世 참찬공(參贊公) 백림(百林)에서 분파되었다. 고려때의 절신(節臣)으로 호는 원모재(遠慕齋)이다. 함평에 원모사(遠慕祠)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둘째, 흥해파(興海派)이다. 6世 직장공(直長公) 세규(世圭)에서 분파되었다. 고려때 직장영동정(直長令同正)을 역임하였다. 후손들이 포항시 등지에 살고 있다. 8)
셋째, 화순파(和順派)이다. 6世 교위공(校尉公) 세재(世縡)에서 분파되었다. 고려때 우교위(右校尉)를 역임하였다. 9)
넷째, 청안파(淸安派)이다. 9世 통례공(通禮公) 인계(仁溪)에서 분파되었다. 고려 문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를 역임하였다. 후손들이 충북 괴산군 등에 살고 있다. 10)
다섯째, 영광파(靈光派)이다. 9世 소윤공(小尹公) 인연(仁漣)에서 분파되었다. 후손들이 전북 부안군 등에 살고 있다. 11)
여섯째, 문숙공파(文肅公派)이다. 10世 군기공(軍器公) 수량(遂良)에서 분파되었다. 후손들이 경산시와 칠곡군 등에 살고 있다. 12)
일곱째, 청주파(淸州派)이다. 10世 청계공(淸溪公) 득선(得宣)에서 분파되었다. 고려조에 무신으로 호(號)는 장열(莊烈)로도 불리기도 한다. 충렬왕때 사순위중랑장(司巡衛中郞將)을 역임하였으며, 원·명군(元明軍)의 난적침입을 막아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충숙왕이 그 공을 기려 평장사(平章事)를 증직하고 기성군(箕城君)에 봉하였으며 청주 남가산(淸州 南駕山)에 설단(設壇)하고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13)
여덟째, 가평파(加平派) 또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이다. 11世 감무공(監務公) 박(珀)에서 분파되었다. 묘소는 실전하고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에 복포사(福浦祠)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14)
아홉째, 경파(京派)이다. 13世 태상경(太常卿) 백(伯)에서 분파되었다. 경기도 파주시 내면 연풍리에 학산사(鶴山祠)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15)
열번째, 고흥파(高興派)이다. 13世 한림공(翰林公) 중일(仲日)에서 분파되었다. 고려말의 문신으로 내사(內寺)를 역임하고 조선조에 한림(翰林)에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16)
열한번째, 금구파(金溝派)이다. 14世 시정공(寺正公) 기건(紀乾)이 분파조이다. 조선조 문신으로 연산군때 생원이 되었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진안현감(鎭安縣監)이 된후 김제시(금구:金溝)에 집을 지어 살게 되니 이로 인해 세거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김제시 일원에 살고 있다. 17)
열두번째, 의흥파(義興派)이다. 16世 선무랑공(宣務郞公) 맹우(孟佑)를 파조로 한다. 후손들이 군위군 등에 살고 있다. 18)
열세번째, 영덕파(盈德派) 또는 양월파(良月派)이다. 16世 참봉공(參奉公) 맹순(孟洵)이 분파조이다. 조선때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을 역임했으며, 묘소는 칠곡군 약목면에 있다
열네번째, 안성파(安城派)이다. 16世 별좌공(別坐公) 맹희(孟僖)가 파조이다. 조선때 금화서(禁火署) 별좌(別坐)를 역임하였다. 19)
열다섯번째, 양양파(襄陽派)이다. 17世 훈도공(訓導公) 달손(達孫)이 파조이다. 훈도를 역임하였으며, 인동에서 강원도 양양으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양양에 세거하게 되었다. 20)
열여섯번째, 초계파(草溪派)이다. 17世 송계공(松溪公) 지손(智孫)이 파조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며 경남 초계군 덕곡면 율원리에 묘소가 있으며, 경남 합천군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1)
열일곱번째, 양주파(楊州派)이다. 17世 통례공(通禮公) 석손(碩孫)이 파조이다. 도사(都事)를 역임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좌통례(左通禮)를 증직받았다. 고양시 일산동 내고봉산에 묘소가 있다. 22)
열여덟번째, 호명파(虎鳴派)이다. 18世 도(濤)가 파조이다. 적손(嫡孫)의 자(子)로 묘소를 실전하여 청주시 북면 호명리 삼보산에 설단(設壇)하였으며, 후손들이 청원군 등지에 살고 있다.
열아홉번째, 울진파(蔚珍派)이다. 18世 참의공(參議公) 연(演)이 파조이다. 호(號)는 송원(松源)으로 정암(靜庵) 조광조의 문인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영양군에 묘소가 있다.
스물번째, 무안파(務安派)이다. 18世 묵암공(默菴公) 부개(傅凱)가 파조이다. 성종조에 헌납(獻納)과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輔國崇錄大夫 領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황음무도(荒淫無道를 항소하다가 전남 무안에 유배되어 정자를 짓고 살았으며, 묘소는 마산에 있다. 23)
인동장씨는 고려조와 조선조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고려조에 시조공의 아들 선(善)은 금오위 상장군(金吾衛 上將軍)을 지냈고, 12世 충정공(忠貞公) 안세(安世)는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녕부윤(德寧府尹) 등을 지냈으며 함흥부사로 있을때에는 성천강에 만세교를 가설하여 현재까지 전해온다고 하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72현(賢)으로 꼽혔다. 인동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서 배향한다. 24)
충정공(忠貞公)의 아들 중양(仲陽)은 고려말의 절신(節臣)으로 김해부사를 지냈고 친구인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윤(漢城尹)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내가 죽은 뒤 고려조의 벼슬을 묘비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이들 부자(父子)는 인동장씨가 자랑하는 절신(節臣)이다. 묘소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있다. 성천로중(成川路中) 감구시(感舊詩)가 전한다. 25)
흥의공(興義公) 표(彪)는 고려말의 무신으로 흥위위(興威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역임하였다. 흥의공(興義公)의 4子와 3서(壻)가 모두 조선초에 수령의 관직에 올랐으니 문중의 드문 경사이다. 태종9년 흥의공(興義公)의 수연(壽宴)에 한자리에 모여 인수(印綬)를 풀어 뜰앞의 괴나무에 걸고 헌수(獻壽)를 드렸음으로 이로 인하여 호를 칠인정(七印亭)이라 하였다. 초예(草隸)의 명필가인 판서 조윤형(曺允亨)이 쓴 편액이 있다. 26)
조선조에 들어서서 인동장씨는 문과 45명, 공신 3명, 장신(將臣) 4명, 정승1명, 왕비 1명을 배출했으며 27), 시호를 받은이가 10여명에 달하는 등 큰 융성을 누렸다. 특히 나라의 위기때는 장군으로 그리고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서서 싸운 이가 너무 많이 배출되어 충의와 의절의 문중으로 일컬어진다.
장령공(掌令公) 수(脩)는 충정공(忠定公) 안세(安世)의 손(孫)으로 세종때 사헌부 집의·장령·도호부사·선공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재임시 불의에 굽히지 않았으며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하였다. 태종때 시(詩)를 지어 인동의 인풍루벽(仁風樓壁)에 걸었다. 묘소는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내동)에 있으며 묘갈이 있다. 28)
죽정공(竹亭公) 잠(潛, 1497∼1552)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진사를 지냈으며 기묘사화때 스승의 적소에 배종하여 기거문후를 시종하다가 사사의 명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였고, 선생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귀향하여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시서예약을 강론하였다. 현암서원(賢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낙서(洛西) 만(晩)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함경도 관찰사·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인조때에는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무를 겸한 명신이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낙서집(洛西集)>이 있다. 그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에서 어려웨라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를 하리라’. 29)
옥산군(玉山君) 돈(暾)은 개천군수(介川郡守)로서 병자호란시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영돈령부사에 추중되었다.
사진(士珍)은 임진왜란시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이름하고 인동과 군위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니 감히 적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적을 추격하다가 분전 끝에 한팔을 잃고 한팔로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하였다. 조정에 알려져 그 충성을 찬상(讚賞)하여 특별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지금도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에 장의사(張義士)가 만든 장군천(將軍泉)이 있으며 충열사(忠烈祠)를 지어 매년 한식일에 제향한다. 30)
여헌(旅軒) 현광(顯光,1554∼1637)은 도일원론(道一元論)을 창시(創始)한 조선조의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이다. 선조조에 학덕(學德)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이조판서·대사헌 등으로 20여차례나 소명이 있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향리인 인동에 묻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인조조 병자호란때는 각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으나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적인 항복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에 들어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효종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인동의
동락서원·구미의 금오서원· 성주 천곡서원·영천의 임고서원·포항 입암서원·의성 빙계서원·청송 송학서원 등에서 배향한다. 저서로는
<여헌문집(旅軒文集)><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역괘총설급구설(易卦總說及究說)><만학요회(晩學要會)><도서발휘(圖書發揮)>등
다수가 있다.
월포(月浦) 장현도(顯道)는 한강과 여헌 양문(兩門)에 수학하여 학행으로 추중을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인동 신월리에 신도비가 있다.
심곡(深谷) 제원(悌元)은 한강과 여헌의 문인으로 선조24년에 사마시에 입격했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인동향교 교수가 되었다. 학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봉림서원(鳳林書院)에 제향되고 문집이 있다. 31)
극명당(克明堂) 내범(乃範)은 한강과 여헌 양문(兩門)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밝았다. 임진란때 창의하고, 만년에는 반계(磻溪)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반계거사(磻溪居士)라 하였다. 평생에 기호(嗜好)와 욕심을 끊으며, 말을 적게 하고, 심기를 편안하게 함을 좌우명으로 <양생금단계(養生金丹契)>를 저술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고 옥계사(玉溪祠)와 기산의 소암서원(嘯岩書院)에 제향하였다.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에 묘비가 있고, 저서로 <가례의절(家禮儀節)>과 문집이 있다.
개옹공 봉한(鳳翰)은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손자로 인동면 황상동에서 태어났으며 한강과 여헌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에서 창의, 왜군의 앞잡이로 아군을 괴롭히던 승려 찬희(贊熙)를 잡아 죽이고 찬숙(贊夙)과 왜장(倭將) 상좌수정(上佐水晶)을 생포하여 의병장 김 면(金 沔)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아우 홍한(鴻翰)·종제인 사진(士珍)도 함께 의병에 자원, 분전하다가 모두 전사하니 당시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불렀다. 성주의 이양서원(伊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지금도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 뒷산이 원수골이라고 불리어지고 있고 원수골 중턱에는 붉은 바위가 있는데 이때 왜군과 중들이 맞아죽은 자리로 구전되고 있다. 평상시에는 학문에 힘쓰던 유생(儒生)이었으며 유사시에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일념으로 붓대신 칼을 잡은 위국충정과 선비정신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개옹공의 아들인 지분헌(知分軒) 이유(以兪, 1598∼1660)는 한강과 여헌의 문인으로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인조11년에 진사시에 입격(入格)하였으며 퇴계(退溪) 이 황의 변무소(辨誣疏)와 사칠변정(四七辯正)을 짓고, 병자호란에 의병을 창의(倡義)하여 군량보급(軍糧補給)을 위해 힘썼으나 항복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양서원(伊陽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는 <추감록(追感錄)>등 다수가 있다.
지분헌(知分軒)의 아들인 신와공(愼窩公) 정옥(挺玉)·가은공(可隱公) 지옥(持玉)·이암공(伊菴公) 수옥(授玉)·농와공(農窩公) 택옥(擇玉) 등도 학덕(學德)으로 당대 이름이 높았다.
청천당(聽天堂) 응일(應一, 1599∼1676)은 현도(顯道)의 차자(次子)로 종숙(從叔)인 현광(顯光)에 출계(出系)되었다. 청렴강직했으며 효종때 사헌부 장령으로 김자점(金自點)의 탐욕·방자함을 탄핵하는 등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간관(諫官)의 전형으로 전해진다. 우승지·부제학(副提學)·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만회당(晩悔堂) 경우(慶遇)는 족조(族祖)인 여헌 문하에서 수학하여 인조5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정묘호란때 의병장으로 창의하였으나 강화(講和)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후 화산서당(花山書堂)을 세워 강학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였고
효종5년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종향되었다. 저서로 <만회당집(晩悔堂集)>이 있다.
세익(張世益)은 송와공(松窩公) 영(嶸)의 후손으로 숙종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훈련원주부·강동 현령·양주 중군·가덕 첨사·해주 영장·삼수 부사를 역임하고, 숙종44년에 함경도 갑산부사로 재임시 기민구휼(饑民救恤)등 많은 선정을 베풀고, 숙종46년에 진주 영장으로 전보되자 갑산읍민들이 길을막고 만류하여 재임(再任)의 특전(特典)을 받았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32)
산은(散隱) 시현(始顯)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17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개령현감을 역임한후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에 추증되고 영천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금강집(錦江集)>이 있다.
무숙공(武肅公) 붕익(鵬翼)은 숙종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영조조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총관(摠管)이 되어 왕을 호종했고 뒤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문무겸전으로 인동장씨를 더욱 빛냈다. 형조판서 재임시 전선(戰船)의 개조도(改造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경남 창원에 선정비가 있다. 무숙공(武肅公)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나라히 태평(太平)이라 무신(武臣)을 발이시니 나같은 영웅은 북색(北塞)에 다 늙거다 아마도 위국정충(爲國精忠)은 나뿐인가 하노라’. 33)
태소(泰紹)는 무과에 급제 후 낙안 군수를 거쳐 여산부사·수원부사·평산부사·회령부사를 역임한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도 및 평안도 병마절도사·양주목사·한성좌윤·부총관(副摠管)·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34)
무숙공의 손자인 지항(志恒)은 조선 영조조의 장신(將臣)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조때 전라도수군절도사·경상우도와 황해도 및 함경도병마절도사·광주부윤·어영대장·한성좌윤·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고 정조때에는 금위대장·훈련대장·한성부판윤·형조판서·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지항(志恒)의 조카 현택(鉉宅)은 순조때 어영대장을 지냈다. 35)
사미헌(四未軒) 복추(福樞, 1815∼1900)는 여헌의 8대손이다. 장원서 별제(掌苑署 別提)·경상도 도사(慶尙道 都事)등을 내렸으나 모두 불사(不仕)하고 오직 학문과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고종27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 이서당(里書堂)을 세워 많은 후진을 교육하여 문인 5백여명을 배출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학맥과 사상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고종31년 부호군(副護軍)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陞敍)되었으나 모두 사절(謝絶)하였다. 효행(孝行)이 지극하였으며 당대 영남의 유종(儒宗)으로 추존(推尊)하였다. 저서로는 <역학계몽(易學啓蒙)><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동몽훈(童蒙訓)>등이 있다. 여헌과 더불어 학문에 통달한 인동장씨의 대표적인 홍유석학이다.
가곡공(可谷公) 경목(敬穆, 1742∼1806)은 지분헌(知分軒) 이유(張以兪)의 5대손이다. 신동으로 일컬어졌으며 학문이 뛰어나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향내의 사림과 함께 사창서당을 창건하고 단산서당을 창립하였다.
한편 인동 장씨는 특히 효행(孝行)의 가문으로 일컬어졌다.
석진(錫震)은 영조때 부친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앞두고 있자 상경하여 길거리에서 주야로 호곡(號哭)하며 비가 오지 않도록 빌었다. 마침 가뭄이 심한지라 형조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불러 그 사연을 듣고 계문(啓聞)하였다. 효자가 원한을 품고 있으니 어찌 가물지 않겠는가 하면서 사형을 감하고 낮은 형벌을 내렸다 한다.
연미정(戀美亭) 석규(錫奎)는 정조24년에 무고(誣告)로 부친은 옥사(獄死)를 당했고 모친(母親)이 태중(胎中)에 수감되어 옥(獄)에서 태어났다. 한달도 안되어 어머니 배(裵)씨가 전라도 강진의 섬으로 유배되자 강보에 싸여 어린 누나와 함께 따라갔다. 그곳에서 아홉 살때 밤중에 향리(鄕吏)가 침입하여 겁탈하려 하자 모녀가 바다에 투신하여 절사(節死)하였다.
그 후 해마다 투신일에 해풍(海風)이 일어 섬사람이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祭)를 지냈다. 혈혈단신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성장한 후 아들 기원(驥遠)을 한양으로 보내 어가(御駕)앞에 나아가 지난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케하여 마침내 신원(伸寃)되었다. 그 지극한 효행이 세상에 알려져 널리 칭송하였다. <연미정 실기(戀美亭 實記)>가 있다. 연미정공(戀美亭公)의 사실(事實)이 위암(韋庵) 지연(志淵)이 쓴 <일사유고(逸士遺稿) 3권 한국기인열전(韓國奇人列傳)>에 실려 있다.
만재(晩齋) 진홍(晉弘)은 죽정공(竹亭公)의 후손으로 일찍이 효경(孝經)을 통독하고, 순조22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모친이 병환이 있어 낫게 해달라고 단지(斷指)하면서 하늘에 빌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간 시묘하였다. 매일 강물을 길러와 조석전(朝夕奠)을 올렸는데 기이하게 여막 아래서 샘이 솟아 한번도 마르지 않다가 시묘를 마치자 샘도 없어졌다. 철종10년에 통훈대부·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문집이 있다.
근·현대에 우뚝선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장석영(張錫英), 순국지사 장태수(張泰秀), 우국언론인 장지연(張志淵), 애국지사 장기석(張基奭), 장면 및 장택상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이 인동장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유헌(遊軒) 석용(錫龍, 1823∼1903)은 여헌의 8대손으로 조선 헌종1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철종13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가 되었고, 이후 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하였고 형조참판·부총관·한성부윤·형조판서 등을 모두 거친 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칠곡군 북삼면 오평리에 신도비가 있다. 子인 승원(承遠)은 경상관찰사, 손(孫) 길상(吉相)은 규장각 직각(奎章閣 直閣), 직상(稷相)은 선산군수, 택상(澤相)은 국무총리이다. 36)
태수(泰秀)는 철종12년에 병과(兵科)에 급제, 이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어 해변의 방비(防備)를 굳게 하고 임진왜란때 순절(殉節)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祭壇)을 수축하는 등 내치에도 힘을 써 칭송이 높았다.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려하자 거절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영전되고 병조참의에 올랐다. 1905년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처벌을 상소했고 단식(斷食)으로 절명(絶命)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을 받았다.
회당(晦堂) 석영(錫英, 1851∼1926)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인으로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소식을 듣고,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등과 영남유생(嶺南儒生) 3백여명을 규합하여 조약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올리고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130일 동안의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을 기록하여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파리독립청원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이 사건으로 2년형(刑)을 언도(言渡)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에 묘비가 있으며 1977년 건국공로로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이 추서 되고 1980년에 국민장(國民章)이 추서 되었다. 저서로 <문집(文集) 22권(卷)>이 있다. 37)
위암(韋庵) 지연(張志淵)은 구한말의 언론인이자 우국지사이다. 고종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통정대부 문헌비고편집위원(通政大夫 文獻備考編輯委員) 등을 지냈으며 1898년 관직을 버리고 남궁억(南宮檍)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또한 독립협회 사업에도 가담하여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02년 황성신문사장(皇城新聞社長)을 맡아 민중계몽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비분(悲憤)에 찬 논설을 실어 서울 장안과 온 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나라 정부대신들이라는 자들은 영리를 바라고 거짓위협을 두려워하여 매국노가 됨으로써 4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동포를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아∼ 분하도다 2천만 동포여…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루밤 사이에 멸망해 버린다 말인가. 아∼ 슬프도다 동포여!’
그로 인해 투옥되기도한 오로지 학문과 독립에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언론인의 대표자이다, 1962년 건국훈장 단장(建國勳章 單章)이 수여되었으며 저서로는 <유교연원(儒敎淵源)><위암문고(韋庵文庫)>등이 있다.
창려(滄旅) 진홍(鎭弘)은 제대후 광복단원에 가입, 러시아의 하바르스크에 망명하여 교포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고 3.1운동 후에 귀국하여 일본의 잔학성과 만세운동자료를 수집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을 저술하였다.
1927년 경북도청과 경찰부(警察部)·조선은행 등의 폭파를 시도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중 옥중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을 받았다. 칠곡군 석적면 남율리에 묘소가 있으며 왜관 낙동강 철교옆 산에 순국의사비(殉國義士碑)를 세웠다. 비문은 국회의장 신익희선생(申翼熙先生)이 지었다.
자하공(紫下公) 기석(基奭, 1863∼1911)은 개옹공의 10대손으로 벽진면 봉계리(집실)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25세에 함양박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가세가 어려워 38세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여 드디어 석학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루는 일왕(日王)의 생일인 소위 천장절(天長節)에 참석을 권유받고도 참석치 않았고 이에 국경반대자(國慶反對者)로 호출장(呼出狀)을 보냈으나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하고 호통을 치며 출두하지 아니하였고 일경(日警)이 결박하여 경찰서로 데리고가 소원을 물으니 “너희들이 물러가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라 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하였으나 단식 27일만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전국유림이
의논하여 자하공(紫下公)의 충의(忠義)와 절개(節槪)를 기리기 위하여 백이숙제(伯夷叔齊)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를 모방하여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집실 자양산에 세우니 비문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글씨는 이동흠(李東欽)이 썼다.
해동청풍비는 조선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라하여 그 이듬해 일경이 그 비를 부수었으며 함양박씨 부인은 목매어 자결을 했다. 광복 후 백범 김 구·심산 김창숙 등이 해동청풍비를 복구할 것을 의논하여 비(碑)조각을 쇳조각으로 복원했는데 심산 김창숙이 비문을 찬(撰)하고 백범 김 구가 서(書)하였으며, 그 옆에 박씨 부인의 기열비(紀烈碑)를 세웠다.
운석(雲石) 면(勉)은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후손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미국 맨하탄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교육계와 천주교에 활약하였으며 해방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초대주미대사, 국무총리를 거쳐 자유당때 민주당을 창당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군사혁명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종교가요 정치가이다.
창랑(滄浪) 택상(澤相)은 7歲에 한학을 수업하여 10歲에 사서삼경 및 한사(漢史)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외교사(外交史)등을 통독(通讀)한후 우남학회(雩南學會)가 경영하는 한성학교(漢城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한뒤에 일본의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하다가 한일합방후 191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대학 경제학과 수학후 1919년 도미(渡美)하여 이승만·조병옥등과 구미위원(歐美委員)으로 활약하였고, 청구구락부사건(靑丘俱樂部事件)으로 투옥되어 일인(日人)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미군정시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초대 외무부장관, 3代 국무총리, 2代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공로로 국민장(國民葬)을 거행하였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담백한 기질과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으로 헌신한 건국의 공로자이다.
백상(栢想) 기영(基榮)은 태상경(太常卿) 백(伯)의 후손으로 일찍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공화당때 부총리겸경제기획원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는 한편 대한체육회회장, I.O.C위원등을 역임하였다. 언론·정치·국민보건에 크게 공헌한 3공화국의 정치가였다.
이외 회산(回山) 준호(俊灝)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8歲의 약관으로 의분을 참지 못하여 자원입대 후 왜적과의 싸움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1909년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10년 한일합방의 국치(國恥)로 보석(保釋)되었다. 3.1운동당시 독립운동을 전개타가 다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망명, 손진구등과 동산학원(東山學院)을 설립, 후진교육에 진력하다가 귀국하여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중 43세로 영면(永眠)하였다.
1977년 독립유공으로 건국공로 대통령표창(建國功勞 大統領表彰)이 추서되고 1989년 회산 장준호 의사 기념사업회(回山 張俊灝義士 紀念事業會)에서 회산공(回山公)의 전기(傳記) 일책(一冊)을 간행하였다.
세파(世播)는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항일학생결사 연구회(抗日學生結社 硏究會)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고취를 주동하였다. 졸업 후 안평국민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던중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비밀결사의 전모가 탄로되어 2년여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5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광복을 눈앞에 두고 순국하였다. 1963년 독립유공으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우리나라 장씨는 전국 약 20만가구 110만여명으로 추정되어 우리나라 씨족가운데 아홉번째 번성한 씨족이다. 이 가운데 인동장씨 종인이 약 65만명 정도로 이는 우리나라 성씨 본관별로 볼때 12위이며, 인동하면 장씨를 연상할 만큼 융성을 누려온 우리나라의 명문거족이다.
현재 구미시 인의동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산거하여 생활하고 있으며, 그중 성주군의 경우 주로 벽진면 봉계리(집실)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 엮은이 : 이 재 필
※ 교 정 : 인동 장씨 대종회
1) 삼중대광은 고려때 정1품직으로 현대의 총리급 / 신호위는 국방을 맡은 6위중 하나이고 상장군은 각 군영의 수직(首職)이며 2군6위에 각1인씩을 두어 군병을 통솔한 현대의 군단장급
2) 인동장씨 장계계(張桂系)의 시조인 계(桂)는 고려 충렬왕때 진현전 직제학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고 옥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이 200여년 동안 칠곡군 석적면에서 세거해오다가 조선 세조때에 이르러 서울 창동, 경북 예천·문경·영주·안동·봉화·의성, 충북 단양·제천 등 전국으로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안양공(安襄公) 말손(末孫)은 조선 세조때 문과급제하여 예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토평하였고 이후 장악원정·해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연복군(延福君:인동의 별호)에 봉해졌다. 문숙공(文肅公) 순손(順孫)은 성종때 문과급제하여 병조 및 이조판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두루 역임하면서 가문을 빛냈다.
3) 인동의 별호는 옥산(玉山)이다. 옥산은 인동 고을원이 사무를 본 관아(官衙)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였다. 인동은 신라초기에 사동화현(斯同火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때 수동(壽同)으로 개칭하고 성산군(星山郡)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때 인동현(仁同縣)으로 개칭하고, 현종때 경산부(京山府)라 하여 지금의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공민왕때 경산부에서 분리되어 인동에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약목현(若木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조선 태종시 다시 인동현으로 개칭하였다가 선조때 찰리사(察理使)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인동의 주악(主嶽)인 천생산(天生山)의 성곽을 수축하고 관방(關防)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후 선산부(善山府)의 관할이었던 해평현(海平縣)이 인동부(仁同府)에 내속(來屬)되었다가 선산으로 다시 환속되었고, 고종때의 지방제도 개편시 인동도호부를 인동군(仁同郡)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시켰고, 1978년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시켰다.
4) 중리·남산·진가·진평·황상은 조선때 인동의 지명이었다.
5) 중직대부는 문관벼슬의 종3품 첫째품계로 현대의 이사관급 / 병마첨절제사는 조선때 각 도에 두었던 종3품 무관직으로 현대의 준장∼소장급. 병마첨절제사는 주로 해당고을의 목사나 부사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6) 예빈시 참봉은 외국사신들을 담당하는 관청인 예빈시의 종9품 하급관리
7) 소모장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에 의병들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벼슬 / 판관은 각 도의 감영이나 주요 고을에 둔 종5품직으로 서기관급
8) 직장영동정은 고려때 각 시·각 서·각고에 둔 7품 및 9품직
9) 우교위는 고려때 종6품(위관급)부터 종9품(하사관급)까지 무관 품계
10) 판통례문사란 조회(朝會)때의 각종 행사절차와 예식을 맡아보던 관청의 수장 / 통훈대부는 문관벼슬의 정3품 당하관 품계로 현대의 관리관급
11) 소윤은 감·시(寺)등의 관청에 속한 4품직으로 부이사관급
12) 군기감이란 병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관청의 정4품직으로 현대의 부이사관급 이상
13) 사순위 중랑장은 2군6위의 정5품직으로 현대의 영관급 장교 / 평장사는 고려때 정2품직의 장관급으로 첨의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첨의시랑찬성사·첨의찬성사·찬성사로 부르기도 했다.
14) 감무란 고려시대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지방행정의 한 단위인 좀 큰 규모의 현에는 현령을 두고 작은 현에는 감무를 두었다.
15) 태상경은 고려때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16) 내사란 왕의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 한림은 고려때 왕의 칙명과 조서를 기록하고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한림원에 소속된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로써 고려문신들은 한림원 재직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17) 사복시정은 왕의 가마와 말(馬)을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18) 선무랑은 종6품직 문관으로 현대의 사무관급
19) 금화서는 서울안의 화재를 막는 일을 맡은 관청으로 별좌는 5품직의 서기관급
20) 훈도는 관상감·전의감·사역원등의 정9품 또는 지방고을 종9품직
21) 사헌부 감찰은 현대의 감사원 또는 검찰청 사무관급
22) 도사는 내직으로 충훈부·의빈부 등의 종5품 또는 각 감영에서 관찰사를 보좌하는 종5품직으로 현대의 서기관급 / 통정대부는 문관 벼슬의 정3품 당상관으로 차관보∼관리관급 / 좌통례는 궁중의 각종 의식에 관한 일을 맡은 통례원의 정3품직으로 차관보∼관리관급
23) 헌납이란 사간원의 정5품직 서기관급 / 보국숭록대부는 문관 벼슬의 정1품직으로 총리급 / 영돈령부사는 왕실의 친척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인 돈령부의 정1품 우두머리 벼슬로 대체로 왕의 장인을 시킴
24) 정헌대부는 조선때 문관 및 무관 벼슬의 정2품 첫째품계인 장관급 / 부윤은 현대의 도지사급 / 두문동 72현이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해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내에 있었던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와 절의를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遺臣)을 말한다.
25) 가선대부는 조선때 문관 및 무관 벼슬의 종2품 둘째품계인 차관∼차관보급 / 한성윤은 서울을 관리하던 총책임자인 판윤밑에 부책임자인 좌·우윤을 두었다. 현대의 서울부시장급이다.
26) 흥위위는 고려 6위(衛)의 하나로 보승(保勝)은 7령(領)과 정용(精勇) 5령으로 조직되었으며 낭장(郞將)은 정6품직으로 현대의 대위∼소령급이다. / 인수라 함은 관인(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을 말한다.
27) 조선 숙종때의 장희빈은 인동 장씨이다. 장희빈은 역관이었던 장 현(張 炫)의 종질녀로 숙종12년에 숙원(淑媛)이 되고 이후 소의(昭儀)에서 빈(嬪)이 되었다. 그 후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정비로 책림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었다. /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는 숙종때 금군별장에서 총융사(摠戎使)의 벼슬에 이르렀다.
28) 사헌부 집의는 현대의 법무부 검찰국장급 정도 / 장령은 부이사관급 / 도호부사는 이사관급 / 선공감 판사는 나라의 토목 및 건축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의 정3품직 차관보급
29) 팔도도원수는 현대의 합참의장이다.
30) 수군절도사(수사)는 조선때 한 도 안의 수군을 통솔하는 정3품 무관직으로 현대의 소장급 이상이다.
31) 오리 이원익은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의 4대손으로 명종∼인조때 학자이자 문신으로 활약하면서 거치지 않은 관직이 없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구원병을 얻으러 명나라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시호는 문충이며 인조 묘정과 여주의 기천서원·시흥의 충현서원·안주의 청천사에 배향되었다.
32) 훈련원 주부는 현대의 국방부·병무청 사무관급 / 현령은 비교적 큰 현의 수령인 종5품 / 중군은 조선때 5군영에 두었던 종2품직으로 소장∼중장급 / 첨사는 종3품의 무관직으로 첨절제사 라고도 한다. 현대의 준장급 정도 / 영장은 총융청·수어청·진무영과 각 도의 병영 및 수영에 소속된 정3품직으로 현대의 소장급 정도이며 해당 고을의 부사나 목사가 겸함
33) 병마절도사(병사)는 각 지방에 두어 군사를 장악하게 했던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각 도마다 한명 또는 두명을 두었고 그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 어영대장은 어영청의 종2품 우두머리인 사단장∼군단장급 / 훈련대장은 군사훈련을 맡아보던 관청인 훈련도감의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 총관(도총관)은 현대의 대장급
34) 부총관은 현대의 중장급 정도 / 삼도수군통제사는 조선때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기 위해 두었던 무관직으로 현대의 해군참모총장급
35) 총융사는 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의 우두머리인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 금위대장은 금위영의 종2품직으로 본래에는 병조판서가 으레히 겸하게 되어 있었으나 영조때부터 따로 두었다.
36) 숭정대부는 문관 및 무관벼슬의 종1품 둘째품계로 부총리급 / 규장각 직각은 왕실족보나 왕들의 글 및 초상들을 보관하는 관청인 규장각의 정3품(차관보~관리관급) 또는 종6품직(사무관급)
37) 한주 이진상의 본관은 ‘성산’이다. 정재 유치명과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연구에만 전념했고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은 대유학자이다. 조선철학을 대표하던 4개 학파중 하나인 ‘한주학파’를 형성하였고 곽종석·이승희·장석영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다.
고려조에 시조공의 아들 선(善)은 금오위 상장군(金吾衛 上將軍)을 지냈고, 12世 충정공(忠貞公) 안세(安世)는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녕부윤(德寧府尹) 등을 지냈으며 함흥부사로 있을때에는 성천강에 만세교를 가설하여 현재까지 전해온다고 하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72현(賢)으로 꼽혔다. 인동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서 배향한다. 24)
충정공(忠貞公)의 아들 중양(仲陽)은 고려말의 절신(節臣)으로 김해부사를 지냈고 친구인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윤(漢城尹)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내가 죽은 뒤 고려조의 벼슬을 묘비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이들 부자(父子)는 인동장씨가 자랑하는 절신(節臣)이다. 묘소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있다. 성천로중(成川路中) 감구시(感舊詩)가 전한다. 25)
흥의공(興義公) 표(彪)는 고려말의 무신으로 흥위위(興威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역임하였다. 흥의공(興義公)의 4子와 3서(壻)가 모두 조선초에 수령의 관직에 올랐으니 문중의 드문 경사이다. 태종9년 흥의공(興義公)의 수연(壽宴)에 한자리에 모여 인수(印綬)를 풀어 뜰앞의 괴나무에 걸고 헌수(獻壽)를 드렸음으로 이로 인하여 호를 칠인정(七印亭)이라 하였다. 초예(草隸)의 명필가인 판서 조윤형(曺允亨)이 쓴 편액이 있다. 26)
조선조에 들어서서 인동장씨는 문과 45명, 공신 3명, 장신(將臣) 4명, 정승1명, 왕비 1명을 배출했으며 27), 시호를 받은이가 10여명에 달하는 등 큰 융성을 누렸다. 특히 나라의 위기때는 장군으로 그리고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서서 싸운 이가 너무 많이 배출되어 충의와 의절의 문중으로 일컬어진다.
장령공(掌令公) 수(脩)는 충정공(忠定公) 안세(安世)의 손(孫)으로 세종때 사헌부 집의·장령·도호부사·선공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재임시 불의에 굽히지 않았으며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하였다. 태종때 시(詩)를 지어 인동의 인풍루벽(仁風樓壁)에 걸었다. 묘소는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내동)에 있으며 묘갈이 있다. 28)
죽정공(竹亭公) 잠(潛, 1497∼1552)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진사를 지냈으며 기묘사화때 스승의 적소에 배종하여 기거문후를 시종하다가 사사의 명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였고, 선생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귀향하여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시서예약을 강론하였다. 현암서원(賢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낙서(洛西) 만(晩)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함경도 관찰사·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인조때에는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무를 겸한 명신이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낙서집(洛西集)>이 있다. 그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에서 어려웨라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를 하리라’. 29)
옥산군(玉山君) 돈(暾)은 개천군수(介川郡守)로서 병자호란시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영돈령부사에 추중되었다.
사진(士珍)은 임진왜란시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이름하고 인동과 군위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니 감히 적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적을 추격하다가 분전 끝에 한팔을 잃고 한팔로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하였다. 조정에 알려져 그 충성을 찬상(讚賞)하여 특별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지금도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에 장의사(張義士)가 만든 장군천(將軍泉)이 있으며 충열사(忠烈祠)를 지어 매년 한식일에 제향한다. 30)
여헌(旅軒) 현광(顯光,1554∼1637)은 도일원론(道一元論)을 창시(創始)한 조선조의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이다. 선조조에 학덕(學德)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이조판서·대사헌 등으로 20여차례나 소명이 있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향리인 인동에 묻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인조조 병자호란때는 각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으나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적인 항복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에 들어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효종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 입암서원(경북기념물 제70호) |
월포(月浦) 장현도(顯道)는 한강과 여헌 양문(兩門)에 수학하여 학행으로 추중을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인동 신월리에 신도비가 있다.
심곡(深谷) 제원(悌元)은 한강과 여헌의 문인으로 선조24년에 사마시에 입격했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인동향교 교수가 되었다. 학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봉림서원(鳳林書院)에 제향되고 문집이 있다. 31)
극명당(克明堂) 내범(乃範)은 한강과 여헌 양문(兩門)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밝았다. 임진란때 창의하고, 만년에는 반계(磻溪)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반계거사(磻溪居士)라 하였다. 평생에 기호(嗜好)와 욕심을 끊으며, 말을 적게 하고, 심기를 편안하게 함을 좌우명으로 <양생금단계(養生金丹契)>를 저술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고 옥계사(玉溪祠)와 기산의 소암서원(嘯岩書院)에 제향하였다.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에 묘비가 있고, 저서로 <가례의절(家禮儀節)>과 문집이 있다.
개옹공 봉한(鳳翰)은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손자로 인동면 황상동에서 태어났으며 한강과 여헌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에서 창의, 왜군의 앞잡이로 아군을 괴롭히던 승려 찬희(贊熙)를 잡아 죽이고 찬숙(贊夙)과 왜장(倭將) 상좌수정(上佐水晶)을 생포하여 의병장 김 면(金 沔)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아우 홍한(鴻翰)·종제인 사진(士珍)도 함께 의병에 자원, 분전하다가 모두 전사하니 당시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불렀다. 성주의 이양서원(伊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지금도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 뒷산이 원수골이라고 불리어지고 있고 원수골 중턱에는 붉은 바위가 있는데 이때 왜군과 중들이 맞아죽은 자리로 구전되고 있다. 평상시에는 학문에 힘쓰던 유생(儒生)이었으며 유사시에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일념으로 붓대신 칼을 잡은 위국충정과 선비정신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개옹공의 아들인 지분헌(知分軒) 이유(以兪, 1598∼1660)는 한강과 여헌의 문인으로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인조11년에 진사시에 입격(入格)하였으며 퇴계(退溪) 이 황의 변무소(辨誣疏)와 사칠변정(四七辯正)을 짓고, 병자호란에 의병을 창의(倡義)하여 군량보급(軍糧補給)을 위해 힘썼으나 항복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양서원(伊陽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는 <추감록(追感錄)>등 다수가 있다.
지분헌(知分軒)의 아들인 신와공(愼窩公) 정옥(挺玉)·가은공(可隱公) 지옥(持玉)·이암공(伊菴公) 수옥(授玉)·농와공(農窩公) 택옥(擇玉) 등도 학덕(學德)으로 당대 이름이 높았다.
청천당(聽天堂) 응일(應一, 1599∼1676)은 현도(顯道)의 차자(次子)로 종숙(從叔)인 현광(顯光)에 출계(出系)되었다. 청렴강직했으며 효종때 사헌부 장령으로 김자점(金自點)의 탐욕·방자함을 탄핵하는 등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간관(諫官)의 전형으로 전해진다. 우승지·부제학(副提學)·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동락서원 강당(지방문화재자료 제21호) |
세익(張世益)은 송와공(松窩公) 영(嶸)의 후손으로 숙종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훈련원주부·강동 현령·양주 중군·가덕 첨사·해주 영장·삼수 부사를 역임하고, 숙종44년에 함경도 갑산부사로 재임시 기민구휼(饑民救恤)등 많은 선정을 베풀고, 숙종46년에 진주 영장으로 전보되자 갑산읍민들이 길을막고 만류하여 재임(再任)의 특전(特典)을 받았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32)
산은(散隱) 시현(始顯)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17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개령현감을 역임한후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에 추증되고 영천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금강집(錦江集)>이 있다.
무숙공(武肅公) 붕익(鵬翼)은 숙종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영조조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총관(摠管)이 되어 왕을 호종했고 뒤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문무겸전으로 인동장씨를 더욱 빛냈다. 형조판서 재임시 전선(戰船)의 개조도(改造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경남 창원에 선정비가 있다. 무숙공(武肅公)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나라히 태평(太平)이라 무신(武臣)을 발이시니 나같은 영웅은 북색(北塞)에 다 늙거다 아마도 위국정충(爲國精忠)은 나뿐인가 하노라’. 33)
태소(泰紹)는 무과에 급제 후 낙안 군수를 거쳐 여산부사·수원부사·평산부사·회령부사를 역임한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도 및 평안도 병마절도사·양주목사·한성좌윤·부총관(副摠管)·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34)
무숙공의 손자인 지항(志恒)은 조선 영조조의 장신(將臣)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조때 전라도수군절도사·경상우도와 황해도 및 함경도병마절도사·광주부윤·어영대장·한성좌윤·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고 정조때에는 금위대장·훈련대장·한성부판윤·형조판서·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지항(志恒)의 조카 현택(鉉宅)은 순조때 어영대장을 지냈다. 35)
사미헌(四未軒) 복추(福樞, 1815∼1900)는 여헌의 8대손이다. 장원서 별제(掌苑署 別提)·경상도 도사(慶尙道 都事)등을 내렸으나 모두 불사(不仕)하고 오직 학문과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고종27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 이서당(里書堂)을 세워 많은 후진을 교육하여 문인 5백여명을 배출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학맥과 사상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고종31년 부호군(副護軍)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陞敍)되었으나 모두 사절(謝絶)하였다. 효행(孝行)이 지극하였으며 당대 영남의 유종(儒宗)으로 추존(推尊)하였다. 저서로는 <역학계몽(易學啓蒙)><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동몽훈(童蒙訓)>등이 있다. 여헌과 더불어 학문에 통달한 인동장씨의 대표적인 홍유석학이다.
가곡공(可谷公) 경목(敬穆, 1742∼1806)은 지분헌(知分軒) 이유(張以兪)의 5대손이다. 신동으로 일컬어졌으며 학문이 뛰어나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향내의 사림과 함께 사창서당을 창건하고 단산서당을 창립하였다.
한편 인동 장씨는 특히 효행(孝行)의 가문으로 일컬어졌다.
석진(錫震)은 영조때 부친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앞두고 있자 상경하여 길거리에서 주야로 호곡(號哭)하며 비가 오지 않도록 빌었다. 마침 가뭄이 심한지라 형조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불러 그 사연을 듣고 계문(啓聞)하였다. 효자가 원한을 품고 있으니 어찌 가물지 않겠는가 하면서 사형을 감하고 낮은 형벌을 내렸다 한다.
연미정(戀美亭) 석규(錫奎)는 정조24년에 무고(誣告)로 부친은 옥사(獄死)를 당했고 모친(母親)이 태중(胎中)에 수감되어 옥(獄)에서 태어났다. 한달도 안되어 어머니 배(裵)씨가 전라도 강진의 섬으로 유배되자 강보에 싸여 어린 누나와 함께 따라갔다. 그곳에서 아홉 살때 밤중에 향리(鄕吏)가 침입하여 겁탈하려 하자 모녀가 바다에 투신하여 절사(節死)하였다.
그 후 해마다 투신일에 해풍(海風)이 일어 섬사람이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祭)를 지냈다. 혈혈단신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성장한 후 아들 기원(驥遠)을 한양으로 보내 어가(御駕)앞에 나아가 지난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케하여 마침내 신원(伸寃)되었다. 그 지극한 효행이 세상에 알려져 널리 칭송하였다. <연미정 실기(戀美亭 實記)>가 있다. 연미정공(戀美亭公)의 사실(事實)이 위암(韋庵) 지연(志淵)이 쓴 <일사유고(逸士遺稿) 3권 한국기인열전(韓國奇人列傳)>에 실려 있다.
만재(晩齋) 진홍(晉弘)은 죽정공(竹亭公)의 후손으로 일찍이 효경(孝經)을 통독하고, 순조22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모친이 병환이 있어 낫게 해달라고 단지(斷指)하면서 하늘에 빌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간 시묘하였다. 매일 강물을 길러와 조석전(朝夕奠)을 올렸는데 기이하게 여막 아래서 샘이 솟아 한번도 마르지 않다가 시묘를 마치자 샘도 없어졌다. 철종10년에 통훈대부·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문집이 있다.
근·현대에 우뚝선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장석영(張錫英), 순국지사 장태수(張泰秀), 우국언론인 장지연(張志淵), 애국지사 장기석(張基奭), 장면 및 장택상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이 인동장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유헌(遊軒) 석용(錫龍, 1823∼1903)은 여헌의 8대손으로 조선 헌종1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철종13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가 되었고, 이후 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15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하였고 형조참판·부총관·한성부윤·형조판서 등을 모두 거친 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칠곡군 북삼면 오평리에 신도비가 있다. 子인 승원(承遠)은 경상관찰사, 손(孫) 길상(吉相)은 규장각 직각(奎章閣 直閣), 직상(稷相)은 선산군수, 택상(澤相)은 국무총리이다. 36)
태수(泰秀)는 철종12년에 병과(兵科)에 급제, 이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어 해변의 방비(防備)를 굳게 하고 임진왜란때 순절(殉節)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祭壇)을 수축하는 등 내치에도 힘을 써 칭송이 높았다.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려하자 거절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영전되고 병조참의에 올랐다. 1905년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처벌을 상소했고 단식(斷食)으로 절명(絶命)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을 받았다.
회당(晦堂) 석영(錫英, 1851∼1926)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인으로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소식을 듣고,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등과 영남유생(嶺南儒生) 3백여명을 규합하여 조약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올리고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130일 동안의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을 기록하여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파리독립청원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이 사건으로 2년형(刑)을 언도(言渡)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에 묘비가 있으며 1977년 건국공로로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이 추서 되고 1980년에 국민장(國民章)이 추서 되었다. 저서로 <문집(文集) 22권(卷)>이 있다. 37)
위암(韋庵) 지연(張志淵)은 구한말의 언론인이자 우국지사이다. 고종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통정대부 문헌비고편집위원(通政大夫 文獻備考編輯委員) 등을 지냈으며 1898년 관직을 버리고 남궁억(南宮檍)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또한 독립협회 사업에도 가담하여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02년 황성신문사장(皇城新聞社長)을 맡아 민중계몽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비분(悲憤)에 찬 논설을 실어 서울 장안과 온 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나라 정부대신들이라는 자들은 영리를 바라고 거짓위협을 두려워하여 매국노가 됨으로써 4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동포를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아∼ 분하도다 2천만 동포여…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루밤 사이에 멸망해 버린다 말인가. 아∼ 슬프도다 동포여!’
그로 인해 투옥되기도한 오로지 학문과 독립에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언론인의 대표자이다, 1962년 건국훈장 단장(建國勳章 單章)이 수여되었으며 저서로는 <유교연원(儒敎淵源)><위암문고(韋庵文庫)>등이 있다.
창려(滄旅) 진홍(鎭弘)은 제대후 광복단원에 가입, 러시아의 하바르스크에 망명하여 교포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고 3.1운동 후에 귀국하여 일본의 잔학성과 만세운동자료를 수집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을 저술하였다.
1927년 경북도청과 경찰부(警察部)·조선은행 등의 폭파를 시도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중 옥중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을 받았다. 칠곡군 석적면 남율리에 묘소가 있으며 왜관 낙동강 철교옆 산에 순국의사비(殉國義士碑)를 세웠다. 비문은 국회의장 신익희선생(申翼熙先生)이 지었다.
자하공(紫下公) 기석(基奭, 1863∼1911)은 개옹공의 10대손으로 벽진면 봉계리(집실)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25세에 함양박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가세가 어려워 38세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여 드디어 석학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루는 일왕(日王)의 생일인 소위 천장절(天長節)에 참석을 권유받고도 참석치 않았고 이에 국경반대자(國慶反對者)로 호출장(呼出狀)을 보냈으나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하고 호통을 치며 출두하지 아니하였고 일경(日警)이 결박하여 경찰서로 데리고가 소원을 물으니 “너희들이 물러가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라 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하였으나 단식 27일만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 해동청풍비(경북기념물 제82호) |
해동청풍비는 조선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라하여 그 이듬해 일경이 그 비를 부수었으며 함양박씨 부인은 목매어 자결을 했다. 광복 후 백범 김 구·심산 김창숙 등이 해동청풍비를 복구할 것을 의논하여 비(碑)조각을 쇳조각으로 복원했는데 심산 김창숙이 비문을 찬(撰)하고 백범 김 구가 서(書)하였으며, 그 옆에 박씨 부인의 기열비(紀烈碑)를 세웠다.
운석(雲石) 면(勉)은 죽정공(竹亭公) 잠(潛)의 후손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미국 맨하탄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교육계와 천주교에 활약하였으며 해방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초대주미대사, 국무총리를 거쳐 자유당때 민주당을 창당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군사혁명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종교가요 정치가이다.
창랑(滄浪) 택상(澤相)은 7歲에 한학을 수업하여 10歲에 사서삼경 및 한사(漢史)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외교사(外交史)등을 통독(通讀)한후 우남학회(雩南學會)가 경영하는 한성학교(漢城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한뒤에 일본의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하다가 한일합방후 191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대학 경제학과 수학후 1919년 도미(渡美)하여 이승만·조병옥등과 구미위원(歐美委員)으로 활약하였고, 청구구락부사건(靑丘俱樂部事件)으로 투옥되어 일인(日人)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미군정시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초대 외무부장관, 3代 국무총리, 2代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공로로 국민장(國民葬)을 거행하였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담백한 기질과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으로 헌신한 건국의 공로자이다.
백상(栢想) 기영(基榮)은 태상경(太常卿) 백(伯)의 후손으로 일찍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공화당때 부총리겸경제기획원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는 한편 대한체육회회장, I.O.C위원등을 역임하였다. 언론·정치·국민보건에 크게 공헌한 3공화국의 정치가였다.
이외 회산(回山) 준호(俊灝)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8歲의 약관으로 의분을 참지 못하여 자원입대 후 왜적과의 싸움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1909년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10년 한일합방의 국치(國恥)로 보석(保釋)되었다. 3.1운동당시 독립운동을 전개타가 다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망명, 손진구등과 동산학원(東山學院)을 설립, 후진교육에 진력하다가 귀국하여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중 43세로 영면(永眠)하였다.
1977년 독립유공으로 건국공로 대통령표창(建國功勞 大統領表彰)이 추서되고 1989년 회산 장준호 의사 기념사업회(回山 張俊灝義士 紀念事業會)에서 회산공(回山公)의 전기(傳記) 일책(一冊)을 간행하였다.
세파(世播)는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항일학생결사 연구회(抗日學生結社 硏究會)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고취를 주동하였다. 졸업 후 안평국민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던중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비밀결사의 전모가 탄로되어 2년여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5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광복을 눈앞에 두고 순국하였다. 1963년 독립유공으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우리나라 장씨는 전국 약 20만가구 110만여명으로 추정되어 우리나라 씨족가운데 아홉번째 번성한 씨족이다. 이 가운데 인동장씨 종인이 약 65만명 정도로 이는 우리나라 성씨 본관별로 볼때 12위이며, 인동하면 장씨를 연상할 만큼 융성을 누려온 우리나라의 명문거족이다.
현재 구미시 인의동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산거하여 생활하고 있으며, 그중 성주군의 경우 주로 벽진면 봉계리(집실)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 엮은이 : 이 재 필
※ 교 정 : 인동 장씨 대종회
1) 삼중대광은 고려때 정1품직으로 현대의 총리급 / 신호위는 국방을 맡은 6위중 하나이고 상장군은 각 군영의 수직(首職)이며 2군6위에 각1인씩을 두어 군병을 통솔한 현대의 군단장급
2) 인동장씨 장계계(張桂系)의 시조인 계(桂)는 고려 충렬왕때 진현전 직제학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고 옥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이 200여년 동안 칠곡군 석적면에서 세거해오다가 조선 세조때에 이르러 서울 창동, 경북 예천·문경·영주·안동·봉화·의성, 충북 단양·제천 등 전국으로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안양공(安襄公) 말손(末孫)은 조선 세조때 문과급제하여 예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토평하였고 이후 장악원정·해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연복군(延福君:인동의 별호)에 봉해졌다. 문숙공(文肅公) 순손(順孫)은 성종때 문과급제하여 병조 및 이조판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두루 역임하면서 가문을 빛냈다.
3) 인동의 별호는 옥산(玉山)이다. 옥산은 인동 고을원이 사무를 본 관아(官衙)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였다. 인동은 신라초기에 사동화현(斯同火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때 수동(壽同)으로 개칭하고 성산군(星山郡)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때 인동현(仁同縣)으로 개칭하고, 현종때 경산부(京山府)라 하여 지금의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공민왕때 경산부에서 분리되어 인동에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약목현(若木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조선 태종시 다시 인동현으로 개칭하였다가 선조때 찰리사(察理使)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인동의 주악(主嶽)인 천생산(天生山)의 성곽을 수축하고 관방(關防)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후 선산부(善山府)의 관할이었던 해평현(海平縣)이 인동부(仁同府)에 내속(來屬)되었다가 선산으로 다시 환속되었고, 고종때의 지방제도 개편시 인동도호부를 인동군(仁同郡)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시켰고, 1978년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시켰다.
4) 중리·남산·진가·진평·황상은 조선때 인동의 지명이었다.
5) 중직대부는 문관벼슬의 종3품 첫째품계로 현대의 이사관급 / 병마첨절제사는 조선때 각 도에 두었던 종3품 무관직으로 현대의 준장∼소장급. 병마첨절제사는 주로 해당고을의 목사나 부사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6) 예빈시 참봉은 외국사신들을 담당하는 관청인 예빈시의 종9품 하급관리
7) 소모장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에 의병들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벼슬 / 판관은 각 도의 감영이나 주요 고을에 둔 종5품직으로 서기관급
8) 직장영동정은 고려때 각 시·각 서·각고에 둔 7품 및 9품직
9) 우교위는 고려때 종6품(위관급)부터 종9품(하사관급)까지 무관 품계
10) 판통례문사란 조회(朝會)때의 각종 행사절차와 예식을 맡아보던 관청의 수장 / 통훈대부는 문관벼슬의 정3품 당하관 품계로 현대의 관리관급
11) 소윤은 감·시(寺)등의 관청에 속한 4품직으로 부이사관급
12) 군기감이란 병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관청의 정4품직으로 현대의 부이사관급 이상
13) 사순위 중랑장은 2군6위의 정5품직으로 현대의 영관급 장교 / 평장사는 고려때 정2품직의 장관급으로 첨의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첨의시랑찬성사·첨의찬성사·찬성사로 부르기도 했다.
14) 감무란 고려시대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지방행정의 한 단위인 좀 큰 규모의 현에는 현령을 두고 작은 현에는 감무를 두었다.
15) 태상경은 고려때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16) 내사란 왕의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 한림은 고려때 왕의 칙명과 조서를 기록하고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한림원에 소속된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로써 고려문신들은 한림원 재직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17) 사복시정은 왕의 가마와 말(馬)을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18) 선무랑은 종6품직 문관으로 현대의 사무관급
19) 금화서는 서울안의 화재를 막는 일을 맡은 관청으로 별좌는 5품직의 서기관급
20) 훈도는 관상감·전의감·사역원등의 정9품 또는 지방고을 종9품직
21) 사헌부 감찰은 현대의 감사원 또는 검찰청 사무관급
22) 도사는 내직으로 충훈부·의빈부 등의 종5품 또는 각 감영에서 관찰사를 보좌하는 종5품직으로 현대의 서기관급 / 통정대부는 문관 벼슬의 정3품 당상관으로 차관보∼관리관급 / 좌통례는 궁중의 각종 의식에 관한 일을 맡은 통례원의 정3품직으로 차관보∼관리관급
23) 헌납이란 사간원의 정5품직 서기관급 / 보국숭록대부는 문관 벼슬의 정1품직으로 총리급 / 영돈령부사는 왕실의 친척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인 돈령부의 정1품 우두머리 벼슬로 대체로 왕의 장인을 시킴
24) 정헌대부는 조선때 문관 및 무관 벼슬의 정2품 첫째품계인 장관급 / 부윤은 현대의 도지사급 / 두문동 72현이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해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내에 있었던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와 절의를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遺臣)을 말한다.
25) 가선대부는 조선때 문관 및 무관 벼슬의 종2품 둘째품계인 차관∼차관보급 / 한성윤은 서울을 관리하던 총책임자인 판윤밑에 부책임자인 좌·우윤을 두었다. 현대의 서울부시장급이다.
26) 흥위위는 고려 6위(衛)의 하나로 보승(保勝)은 7령(領)과 정용(精勇) 5령으로 조직되었으며 낭장(郞將)은 정6품직으로 현대의 대위∼소령급이다. / 인수라 함은 관인(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을 말한다.
27) 조선 숙종때의 장희빈은 인동 장씨이다. 장희빈은 역관이었던 장 현(張 炫)의 종질녀로 숙종12년에 숙원(淑媛)이 되고 이후 소의(昭儀)에서 빈(嬪)이 되었다. 그 후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정비로 책림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었다. /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는 숙종때 금군별장에서 총융사(摠戎使)의 벼슬에 이르렀다.
28) 사헌부 집의는 현대의 법무부 검찰국장급 정도 / 장령은 부이사관급 / 도호부사는 이사관급 / 선공감 판사는 나라의 토목 및 건축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의 정3품직 차관보급
29) 팔도도원수는 현대의 합참의장이다.
30) 수군절도사(수사)는 조선때 한 도 안의 수군을 통솔하는 정3품 무관직으로 현대의 소장급 이상이다.
31) 오리 이원익은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의 4대손으로 명종∼인조때 학자이자 문신으로 활약하면서 거치지 않은 관직이 없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구원병을 얻으러 명나라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시호는 문충이며 인조 묘정과 여주의 기천서원·시흥의 충현서원·안주의 청천사에 배향되었다.
32) 훈련원 주부는 현대의 국방부·병무청 사무관급 / 현령은 비교적 큰 현의 수령인 종5품 / 중군은 조선때 5군영에 두었던 종2품직으로 소장∼중장급 / 첨사는 종3품의 무관직으로 첨절제사 라고도 한다. 현대의 준장급 정도 / 영장은 총융청·수어청·진무영과 각 도의 병영 및 수영에 소속된 정3품직으로 현대의 소장급 정도이며 해당 고을의 부사나 목사가 겸함
33) 병마절도사(병사)는 각 지방에 두어 군사를 장악하게 했던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각 도마다 한명 또는 두명을 두었고 그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 어영대장은 어영청의 종2품 우두머리인 사단장∼군단장급 / 훈련대장은 군사훈련을 맡아보던 관청인 훈련도감의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 총관(도총관)은 현대의 대장급
34) 부총관은 현대의 중장급 정도 / 삼도수군통제사는 조선때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기 위해 두었던 무관직으로 현대의 해군참모총장급
35) 총융사는 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의 우두머리인 종2품직으로 사단장∼군단장급 / 금위대장은 금위영의 종2품직으로 본래에는 병조판서가 으레히 겸하게 되어 있었으나 영조때부터 따로 두었다.
36) 숭정대부는 문관 및 무관벼슬의 종1품 둘째품계로 부총리급 / 규장각 직각은 왕실족보나 왕들의 글 및 초상들을 보관하는 관청인 규장각의 정3품(차관보~관리관급) 또는 종6품직(사무관급)
37) 한주 이진상의 본관은 ‘성산’이다. 정재 유치명과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연구에만 전념했고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은 대유학자이다. 조선철학을 대표하던 4개 학파중 하나인 ‘한주학파’를 형성하였고 곽종석·이승희·장석영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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